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타 히데토시 (문단 편집) === [[AS 로마]] === [[파일:나카타 30m.gif|width=450]] 2001년 5월 6일,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2-0으로 밀리고 있던 상황에 토티와 교체된 나카타는 후반 24분 30m 중거리 슈팅으로 만회골을 기록하고 경기 종료 직전 [[빈첸조 몬텔라]]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2-2 무승부를 이끌었다. 00/01 시즌 로마는 유벤투스를 승점 2점차로 제치고 [[스쿠데토]]를 차지했는데 나카타의 유벤투스전 활약은 리그 우승의 분수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벤투스전 인생 경기 하나만 가지고 그의 로마 소속 활약상이 좋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AS 로마로 이적하기는 했는데 당시 AS 로마의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는 다름 아닌 '''[[프란체스코 토티]]'''였다.[* 당시 AS 로마의 스쿼드는 [[프란체스코 토티]],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카푸]], [[알다이르]], [[빈첸초 몬텔라]] 등 슈퍼스타들이 즐비했다.] 그렇게 첫 시즌에 주 포지션이 아닌 [[https://www.joongang.co.kr/article/765703#home|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고 시원치 않자 그 다음 시즌이자 우승 시즌에는 아예 토티의 백업 자원으로 분류되었다. 당시 출전 시간은 [[https://fbref.com/en/players/917ee796/Hidetoshi-Nakata|531분에 불과했으며,]]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기 힘들다.[* 대신 UEFA컵에서는 선발로 기용되어 토티가 리그 우승에 전념하는데 쏠쏠한 도움을 줬다.] 당시에도 나카타가 토티의 포지션 라이벌로 등장하면서 토티가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출처 자체가 불분명하고 신빙성이 낮은 루머였다.[* 만약 토티가 진짜로 당시에 불면증에 시달렸다면 자신이 AS 로마의 주장으로 있으면서 세리에 A의 다른 빅클럽들을 제치고 반드시 우승을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에 의한 중압감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당시 팀 내 최고의 선수이자 세계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한 명이었던 전성기의 토티와 백업 선수에 불과했던 나카타는 레벨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나카타의 실력이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상대가 너무 안 좋았던 것.] 당시 세리에 A가 세계 올스타를 연상시킬 만큼 유명한 선수들이 많았고 이른바 [[7공주(축구용어)|7공주]] 시절이었다는 압도적인 수준이었다는 이유로 올드팬들 사이에서는 나카타가 스쿠데토 멤버였던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견들도 많다. 그러나 7공주 시절이라며 [[추억 보정]]으로 얘기되는 것과 달리 실상은 UEFA 랭킹이나 유럽 대항전 결과들을 볼 때 나카타가 [[AS 로마]]로 이적하고 활약하는 시점에서 압도적이었던 세리에 A의 전성기는 끝이 났고 오히려 재정 규모에 맞지 않는 과도한 투자로 쌓인 거품이 빠져가기 시작하고 유럽 대항전에서도 그 전의 모습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동네북으로 전락한 시기였다.[* 과도한 투자를 한 세리에 A의 중소 규모 클럽들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결국 재정난에 시달리며 빅클럽에 스타 플레이어들을 이적시켜야 했다. 나카타와 같이 로마에서 우승을 한 피오렌티나 소속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AS 로마 이적, 라치오 소속의 [[파벨 네드베드]]의 유벤투스 이적, [[알레산드로 네스타]]의 AC 밀란 이적, 피오렌티나 소속의 [[후이 코스타]]의 AC 밀란 이적, 파르마 소속의 [[잔루이지 부폰]]과 [[릴리앙 튀랑]]의 유벤투스 이적, [[파비오 칸나바로]]의 인터밀란 이적이 그러한 경우다. 빅클럽들은 빅클럽대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해도 우승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결국 다른 나라의 빅클럽들에 스타 플레이어들을 이적 시켜야 했다. 유벤투스 소속의 [[지네딘 지단]]과 인터 밀란 소속의 [[호나우두]]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이 그러한 경우다.] 정확히 1999-00 시즌부터 [[라리가]]에게 유럽 리그 랭킹 1위 자리를 내줬고, 1995-96 시즌 유벤투스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이후 2002-03 시즌 AC 밀란이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할 때까지 세리에 A의 어느 팀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으며[* 1998-99 시즌부터 2001-02 시즌까지는 어느 세리에 A팀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커녕 결승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1999-00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AC 밀란이 조별 리그에서 최하위로 탈락했으며, 2000-01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인터 밀란이 조별 리그 진출조차 하지 못하고 스웨덴의 헬싱보리에게 밀리며 예선에서 탈락, 유벤투스가 지단의 박치기 퇴장 징계의 영향이 있다고 하지만 조별 리그에서 최하위로 탈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7공주로 대표되는 평준화가 몰락하고 AC 밀란, 인터 밀란, 유벤투스 등의 빅클럽으로 선수들이 쏠리고 나서야 이들 빅클럽을 중심으로 세리에 A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다시 우승을 했다.], [[UEFA 유로파 리그]]의 경우 1998-99 시즌 파르마 이후로 우승팀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세리에 A 팬들은 7공주 시절 리그 우승이 유럽 대항전보다 더 중요해서 유럽 대항전은 포기하고 리그에 집중한 거라고 변명을 하지만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할 경우의 수익이 리그 우승보다 더 크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오히려 1997-98 시즌부터 리그 챔피언들만 나가던 [[유러피언컵]]이 리그 챔피언이 아니어도 리그 상위권 팀들이 나갈 수 있는 UEFA 챔피언스 리그로 개편 되었기 때문에 유럽 대항전 진출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수익을 노리고 과도한 투자를 하면서까지 리그에 집중했던 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009-10 시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거둔 뒤로 세리에 A에선 그 어떤 유럽 클럽 대회 우승이 없었다가 공교롭게도 인테르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당시 감독이던 [[주제 무리뉴]]가 다시 세리에 A로 돌아와 감독을 맡았는데 그게 바로 AS 로마였고 감독을 맡은 첫 시즌인 2021-22 [[UEFA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에서 우승하며 12년 만에 세리에 A 구단에 유럽 대항전 우승컵을 다시 안겼다. 그럼에도 당시 유럽에 진출한 아시아 축구 선수들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아시아 축구와 유럽 축구와의 수준의 차이가 컸던 것을 감안하면 어찌 됐든 아시아 역대 최초의 [[스쿠데토]] 멤버[* 두 번째는 [[SSC 나폴리]] 소속으로 2022-23 시즌 스쿠데토를 따낸 한국의 [[김민재]].]인 만큼 아시아 축구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여지는 충분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